김중미 작가와의 만남
9월 18, 2009
지난 9월 11일, 학교 강당에서 제 2회 작가와의 만남이 열렸다. 김중미 작가님은 『괭이부리말 아이들』로 대중에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이다. 작가님의 네임 밸류도 있고 지난번 『국경없는 마을』의 박채란 작가님과의 만남이 꽤 성공적이었던만큼 행사의 숨겨진 주체인 동아리 낙서(樂書)의 한 구성원으로서 좀 더 많은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이 몰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별 차이는 없었다―특히 학부모님들은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덜 오셨다.
작가님의 바쁜 일정 때문에 한 시간 반 남짓 진행된 행사는 크게 작가님 말씀과 문답 시간으로 나누어졌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왔지만, 주로 논점은 ‘가난’에 맞추어졌다. 김중미 작가님은 어려서부터 가난들을 겪어 왔고, 지금까지도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운영하며 ‘가난한’ 삶을 택하여 살아가고 계시는 분이다. 가난한 삶들은 다만 무기력하기만 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힘없는 자들의 힘’, 즉 오늘날 사라져가는 공동체의 따뜻함을 발견할 수 있다.
덕분에 ‘가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가난이란 무엇인가? 가난이 대물림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기득권을 가진 사회적, 경제적 강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켜 그들이 무능한데다가 게으르기 때문에 결코 가난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고, 능력만 있다면 부자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다르다. 사회적 장벽은 약자들이 뛰어넘기에는 너무나 터무니없이 높고, 더군다나 그들의 자녀들―한창 미래를 전망해야 할 청소년들―에게는 꿈을 꿀 기회조차도 주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그 벽의 그늘 아래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이 가난을 대물림시키는 것이다.
“강자와 약자의 싸움에서 아무 편도 들지 않는 것은 강자의 편을 드는 것이다.” (브라이언 파머) 우리가 ‘방관자’의 시선으로 이 사실을 지켜본다면 이 문제는 회자되는데서 그칠 것이다. 작가님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셨지만, 모든 가난을 몸과 마음으로 경험한 인간(人間)의 말에서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힘’을 믿고 겸허히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알려야 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꿈과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다.” (넬슨 만델라)




서지영
지영아. 살기 좋은 세상, 평화는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나’ 아닌 ‘너’와 ‘우리’를 선택하는데 있단다. 책 많이 보고.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따뜻한 시선과 바른 마음을 갖길 바라. 멋진 중학생 시절 보내라.
2009. 9. 11
김중미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9월 12, 2009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박정대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낡은 태양의 오후를 지나 또 무수한 상점들을 지나
거리에 갔으므로 너무나 지쳐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등 뒤로는 음악같은 나뭇잎들이 뚝뚝 떨어지고,
서러운 저녁의 풍경의 저녁이 짐승처럼 다가오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성냥을 꺼내어 한 점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영원은 그렇게 본질적인 불꽃 속에 숨어 있다가
어느 한순간 타오르기도 한다.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아니
그날 내가 불멸을 찾아 나섰는지도 모른다.
뿌연 공기들을 헤치며 이 지상에는 없는 시간을
나는 나섰다
내가 한 마리의 식물처럼 고요했던 시간,
내가 한 그루의 짐승처럼 그렇게 타올랐던 시간,
바람과 불의 시간을 지나 공기의 정원에서 내가 얼음 꽃을
피워 올렸던 그 단단한 침묵의 시간들 찾아 나섰다
그런데 그날 불멸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늘 불멸을 꿈꾸었지만, 그렇게 불멸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오히려 불멸이 너무나 낯설었는데,
어쨌든 불멸은 내가 갔던 거기에, 그렇게 당도해 있었다.
네가 불멸이니, 그때 너무나 당황했으므로 나는 속으로 그렇게
물어보았는지도 모른다.
불멸이 이제 나에게 당도했으므로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른다.
오랫동안 불멸을 꿈꾸어 왔지만 불멸이 나에게 당도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불멸 앞에서 이 세계의 본질적인 사랑을 생각한다.
불멸도, 사랑도, 내 생각으로는 그저
저 스스로 존재하는 그 무엇일 뿐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에게 또 불멸의 아름다운 시를 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쓰지 않는다. 불멸의 아름다움이란,
느끼는 자의 내면 속에서 수시로 숨 쉬고 존재하며,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가 아니므로 불멸이 아니고 불멸이 아니므로,
이것은 불멸의 시가 된다.
그렇다. 당신이 이 글에서 시를 읽어내려고 했다면
당신은 이미 시인이다
그러나 시 아닌 무엇을 읽어냈다면
이미 당신은 또 하나의 불멸인 것이다.
그대를 찾아 나섰다가 나는 불멸을 만났다.
그러나 나는 아직 불멸이 몹시도 불편하고 어색하다.
불멸이 나를 찾아 왔을 때 나는 불멸이 아니었지만
나도 언젠가는 내가 꿈꾸던 불멸에 닿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저 별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므로
나도 언젠가는 불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먼 훗날, 태양이 식어가는 낡고 오래된 천막 같은
밤하늘의 모퉁이에서 서러운 별똥별로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살아 있으므로
나는 불멸이 아니라 오래도록 너의 음악이다.
그때까지 사랑이여, 내가 불멸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그때까지 불멸이여, 내가 사랑이 아니더라도 나를 꿈꾸어다오.
있는 그대로 나에게로 와서 나를 때린,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하나이다.
슬픈 하늘
9월 11, 2009
